졸업장이 아니라 경력증명서를 받아라
2023년 11월 첫째 주 금요일 오후 8시, 대치동 은마아파트 사거리 인근의 한 프리미엄 입시 컨설팅 센터. 상담실 테이블 위에는 2024학년도 서울대학교 수시 모집 요강과 S전자 산학협력 특별전형 안내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대기번호 14번을 쥐고 두 시간째 기다린 학부모의 질문은 명확했다. "의대가 안 되면 최소한 명문대 간판이라도 잡아야 하는데, 계약학과를 쓰면 우리 아이 학벌이 깎이는 것 아닌가요." 그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렸고, 손에 쥔 합격 수기집은 땀에 젖어 있었다. 그것은 시장이다. 공포를 먹고 자라는 가장 완


2023년 11월 첫째 주 금요일 오후 8시, 대치동 은마아파트 사거리 인근의 한 프리미엄 입시 컨설팅 센터. 상담실 테이블 위에는 2024학년도 서울대학교 수시 모집 요강과 S전자 산학협력 특별전형 안내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대기번호 14번을 쥐고 두 시간째 기다린 학부모의 질문은 명확했다. "의대가 안 되면 최소한 명문대 간판이라도 잡아야 하는데, 계약학과를 쓰면 우리 아이 학벌이 깎이는 것 아닌가요." 그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렸고, 손에 쥔 합격 수기집은 땀에 젖어 있었다. 그것은 시장이다. 공포를 먹고 자라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시장. 불안을 연료로 삼아 수백억 원의 자본이 이동하는 이곳에서, 부모들은 변해버린 세계의 규칙을 낡은 잣대로 측정하려 든다.
한국의 입시 제도는 오랫동안 명문대 졸업장이라는 '여권(Passport)'을 발급하는 데 집중해 왔다. 그러나 2023년 7월 한국교육개발원(KEDI)이 발표한 '수요 맞춤 고등교육' 연구 보고서는 이 여권의 효력이 만료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업이 요구하는 직무 역량과 대학이 배출하는 졸업생의 수준 사이에는 거대한 균형 붕괴가 발생했다. 명문대 졸업장이라는 여권은 교양 있는 시민임을 증명하는 범용 신분증일 뿐, 특정 기업의 문을 여는 '비자(Visa)'가 되지 못한다. 제도는 농담이 됐다. 부모들은 수억 원의 사교육비를 들여 여권을 갱신하려 하지만, 정작 노동 시장의 입국 심사대는 구체적인 실무 비자를 요구하고 있다. 이 구조적 시차 속에서 교육은 철저히 소비적인 지위재로 전락했다.
대기업 인사 담당자들의 서류 평가 기준은 201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완전히 재편됐다. 2024년 현재 시총 상위 10대 기업의 신입 채용 공고를 분석해 보면 직무 경험이라는 단어가 전공보다 3배 이상 자주 등장한다. 실무 증명(Proof of work)이 없는 명문대 졸업장은 가구도, 수도 시설도 없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텅 빈 성과 같다. 밖에서는 경탄을 자아내지만 안에서는 하루도 버틸 수 없는 폐허다. 그럼에도 대치동 초등 의대관 대기자 3,412명은 여전히 그 빈 성의 열쇠를 얻기 위해 청춘을 담보 잡힌다. 그들은 간판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을 실제 생존 확률과 착각하도록 훈련받았다. 돈이 들어왔고, 사람이 따라왔고, 규칙이 휘어졌다. 아무도 쓰지 않는 죽은 지식을 주입하기 위해 수많은 학생의 10대가 소모되는 현상을 우리는 교육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거대한 자원의 폐기다.
학부모들이 명문대라는 브랜드에 집착하는 이유는 단순한 허영심이 아니다. 1990년대 학번까지는 대학의 이름이 곧 생애 소득의 하한선을 방어하는 확실한 보험표였기 때문이다.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노동 시장의 안정성이 무너지는 과정을 목격한 세대에게, 명문대 타이틀은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안전판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2020년대를 관통하며 이 인센티브 구조는 해체되었다. 대학은 더 이상 지식의 독점적 공급자가 아니며, 기업은 신입사원을 교육할 시간과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 2022년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서울권 주요 대학 인문계열 졸업생의 유지 취업률은 매년 하락 곡선을 그리고 있다. 부모의 불안이 만들어낸 거대한 입시 산업은 이 불편한 진실을 은폐하며 매년 새로운 불안을 직조해낸다.
역설은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정문이 닫히고, 변두리로 취급받던 측문이 열리면서 완성된다. 글로벌 셰프 사관학교나 특정 IT 기업이 직접 설계한 채용 연계형 초단기 학위(Micro‑degree) 프로그램들은 전통적 대학의 간판을 지우고 노동 시장으로 직행하는 파이프라인을 구축했다. 2025학년도 입시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은 최상위권 학생들이 4년제 종합대학의 낭만을 포기하고, 졸업 전 이미 글로벌 기업의 실무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사전 커리어(Pre‑career) 트랙으로 이탈하고 있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이제 낡은 교과서 대신 시장의 최전선에서 데이터를 만지고 코드를 짜며 자신의 쓸모를 입증한다. 합격증의 시대가 저물고, 증명된 경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다시 은마아파트 사거리의 그 좁은 상담실로 돌아가 보자. 테이블 위에 놓인 명문대 입학 안내서는 곧 유효기간이 끝나는 값비싼 영수증이다. 불안에 떠는 부모들이 직시하지 못하는 진정한 공포는 아이가 1지망 대학에 가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다. 4년 뒤 대학 졸업장을 받아 들고 세상에 나왔을 때, 그 종이 한 장 외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할 어떤 실무 정보(Data)도 갖지 못한 고학력 무능력자를 마주하게 되는 현실이다. 경쟁의 본질은 이미 대학 입학의 문턱을 넘어, 대학 기간 내에 기업이 다투어 매입할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의 문제로 이동했다. 상담실의 시계는 밤 10시를 향해 가고 있었지만, 학부모가 쥐고 있는 질문의 방향표는 여전히 20세기의 낡은 지도를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