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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학습

자기주도학습이라는 환상을 버려라

오후 11시, 대치동의 한 프리미엄 독서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열일곱 살 소년의 등은 완벽한 정적 속에 있다. 스마트폰은 입구의 보관함에 영치되었고, 책상 위에는 분 단위로 쪼개진 플래너와 엄선된 문제집만이 놓여 있다. 부모는 이 정지 화면 같은 뒷모습을 보며 안도한다. 아이가 비로소 ‘자기주도학습’의 궤도에 올랐다고 믿기 때문이다. 매달 수백만 원을 지불하는 학습 매니지먼트 컨설팅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 평온한 풍경의 이면에는 거대한 역설이 숨어 있다. 소년은 지금 스스로 항해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견인차에 끌려가고

헤아 · 6분 읽기
자기주도학습이라는 환상을 버려라

오후 11시, 대치동의 한 프리미엄 독서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열일곱 살 소년의 등은 완벽한 정적 속에 있다. 스마트폰은 입구의 보관함에 영치되었고, 책상 위에는 분 단위로 쪼개진 플래너와 엄선된 문제집만이 놓여 있다. 부모는 이 정지 화면 같은 뒷모습을 보며 안도한다. 아이가 비로소 ‘자기주도학습’의 궤도에 올랐다고 믿기 때문이다. 매달 수백만 원을 지불하는 학습 매니지먼트 컨설팅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 평온한 풍경의 이면에는 거대한 역설이 숨어 있다. 소년은 지금 스스로 항해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견인차에 끌려가고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 교육 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거래되는 상품은 역설적이게도 ‘자율’이다. 과거의 사교육이 지식을 주입하는 ‘강의’ 중심이었다면, 현재 상위 1%의 사교육은 아이의 시간을 통제하는 ‘설계’로 진화했다. 소위 ‘자기주도학습 컨설팅’이라 불리는 이 서비스는 아이의 수면 시간, 오답 노트의 양식, 심지어는 쉬는 시간의 호흡까지 규정한다. 부모는 아이가 스스로 책상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지만, 실상 그 아이는 학원 매니저가 정해준 레일 위를 달리는 정교한 장난감 기차에 불과하다. 이것은 자기주도가 아니라, 타인에 의해 완벽하게 박제된 ‘타기(他己)주도학습’의 정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입시 전략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주도성’이라는 개념을 얼마나 기만적으로 소비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징후다. 2026년 4월 21일, 세종대 학정포럼에서 구영현 교수가 발표한 내용은 우리가 매달려온 이 고립된 노동의 종말을 예고한다. 구 교수는 미래 경쟁력의 핵심이 단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AGI(범용인공지능)와 에이전틱 AI를 도구로 삼아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기획자적 역량’에 있다고 단언했다. 같은 해 KEDI(한국교육개발원) 보고서 역시 대학의 평가 체계가 데이터 기반의 고등교육 성과 관리로 전환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제 정답을 맞히는 속도는 평가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관리’를 ‘성장’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율주행차의 조수석에 앉아 핸들을 만지작거린다고 해서 운전 실력이 느는 것은 아니다. 대치동의 컨설팅 시스템은 아이에게서 ‘실패할 권리’와 ‘방황할 시간’을 박탈한다. 스스로 무엇이 부족한지 고민하고, 시행착오를 거쳐 자신만의 학습 경로를 찾아가는 과정이 생략된 채, 오직 최적화된 결과값만을 강요받는다. 이렇게 길러진 아이들은 관리자가 사라지는 순간 극심한 무기력증에 빠진다.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기에, 정해진 매뉴얼이 없는 돌발 상황 앞에서는 무능해진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수조 원을 들여 키워낸 ‘유능한 수동성’의 실체다.

우리는 이제 ‘자기주도’라는 단어에 씌워진 환상을 걷어내야 한다. 진정한 주도성이란 고립된 책상 앞에서 12시간 동안 문제집을 푸는 인내심이 아니다. 그것은 복잡한 현실 세계 속에서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AI라는 강력한 비서를 어떻게 부려 결과를 도출할지 설계하는 ‘에이전틱(Agentic) 리더십’에 가깝다. 정해진 정답을 남들보다 빨리 찾아내는 능력은 이미 AGI의 기본 사양이다. 인간에게 남겨진 유일한 영토는 ‘어떤 정답을 찾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기획의 영역이다.

부모들이 매달 납부하는 고액의 컨설팅 비용은 아이의 미래를 위한 투자가 아니라, 부모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그림자 세금’에 가깝다. 아이를 완벽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착각이 부모를 안심시킬지는 몰라도, 아이의 진짜 생존 근육은 퇴화시키고 있다. 다가오는 AGI 시대의 엘리트는 매니저가 짜준 스케줄표를 충실히 이행하는 ‘성실한 대리인’이 아니다. 스스로 판을 짜고, 기술을 도구화하며, 불확실성 속에서 의사결정의 책임을 지는 ‘에이전틱 기획자’들이다.

지금 우리 아이가 앉아 있는 책상을 다시 보라. 그곳은 아이가 자신의 우주를 탐험하는 조종석인가, 아니면 타인이 설계한 목적지로 실려 가는 컨베이어 벨트인가. 정해진 레일 위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은 이제 가장 위험한 투자가 되었다. 아이에게서 플래너를 뺏고 질문을 돌려주어야 한다. 스스로 경로를 이탈해보고, 다시 돌아오는 법을 배우는 그 짧은 혼란만이 AGI라는 거대한 파도 위에서 아이를 생존하게 할 유일한 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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