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헤아헤아
AI·학습

계획만 짜는 아이는 AI에 대체된다

2025년 3월 22일, 토요일 오전 10시 40분.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사거리의 스타벅스 2층은 도서관이 된 지 오래다. 유리창 너머로 오가는 학원 셔틀버스의 노란색 행렬이 잠시 시선을 끈다. 매장 안 공기는 섭씨 23도, 습도…

헤아 · 9분 읽기
계획만 짜는 아이는 AI에 대체된다

계획은 죽었다, 이제 실행가의 시간

Hook (장면)

2025년 3월 22일, 토요일 오전 10시 40분.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사거리의 스타벅스 2층은 도서관이 된 지 오래다. 유리창 너머로 오가는 학원 셔틀버스의 노란색 행렬이 잠시 시선을 끈다. 매장 안 공기는 섭씨 23도, 습도 45%로 정밀하게 제어되고 있지만, 그 속에는 10대들의 긴장으로 밀도가 다르다. 창가 구석 자리, 외대부고 2학년 이 모 군은 스터디 플래너와 씨름 중이다. 고쿠요(KOKUYO) 사의 B5 사이즈 모눈 노트 위에는 0.38mm 시그노 펜과 5가지 색의 마일드라이너 형광펜이 정렬해 있다. ‘수학(미적분) 쎈 C단계 3회독’, ‘언매(언어와 매체) 기출 2021-2023 전 지문 구조도 분석’. 분 단위로 쪼개진 계획표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건축물이다. 이 군의 목표는 의대다. 그의 계획표는 ‘관리된 성실성’이라는 이름의 제물을 바치는 정교한 의식이다.

그로부터 세 테이블 건너, 같은 학교 2학년 박 모 군의 노트북 화면에는 검은 배경의 코드 에디터만 가득하다. 파이썬(Python)으로 만든 간단한 웹 스크레이퍼가 특정 사이트에서 자꾸 차단당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시간째 머리를 싸매고 있다. 그의 책상 위에는 플래너 대신 구겨진 A4 용지 몇 장과 ‘stackoverflow.com’이라 휘갈겨 쓴 메모뿐이다. 그의 목표는 명확한 학과가 아니다. 그냥, ‘내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 군이 완벽한 계획의 완성을 향해 나아갈 때, 박 군은 수십 번의 실패와 한 번의 작은 성공 사이를 위태롭게 오간다. 두 학생은 같은 교실에서 같은 수업을 듣지만, 사실상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다. 한 명은 과거의 규칙을 마스터하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미래의 규칙과 맨몸으로 싸우는 중이다.

Analysis (해부)

대치동의 풍경은 낯설지 않다. 이 군의 플래너는 지난 30년간 한국 교육 시스템이 신봉해 온 ‘계획 지상주의’의 압축판이다. 1994년 대학수학능력시험(CSAT) 도입 이래, 입시는 정해진 길을 얼마나 오차 없이 걷는가의 경쟁이었다. 2007년 입학사정관제(현 학생부종합전형) 도입은 이 경쟁의 판도를 바꾼 것 같았지만, 본질은 같았다. 경쟁의 무대가 교과서 밖 ‘비교과 활동’으로 확장됐을 뿐, ‘잘 설계된 포트폴리오’라는 또 다른 형태의 계획 경쟁을 낳았다. 2024학년도 서울대 정시모집 합격생의 학생부 평가 평균 등급은 1.83등급(서울대 입학처, 2025.02)이었다. 이는 수능 점수라는 단일 잣대 외에도 고교 3년간의 ‘관리된 이력’이 당락을 갈랐음을 통계적으로 증명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 Bourdieu)가 ‘아비투스(habitus)’라 명명했던, 특정 계층의 문화자본이 어떻게 세대를 거쳐 재생산되는지를 보여주는 21세기 한국적 사례다.

그런데 이 견고한 계획의 성채에 균열이 생겼다. 균열의 이름은 인공지능, 더 정확히는 ‘에이전틱 AI(Agentic AI)’다. 세종대 구영현 교수가 최근 한 포럼에서 언급했듯, 이제 AI는 단순히 질문에 답하는 대규모 언어 모델(LLM)을 넘어,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단계로 진입했다(뉴시스, 2025.10). 이 군이 몇 날 며칠을 고심해 만든 학습 계획표는, 이제 AI에게 “현재 고2, 목표는 서울대 의대, 모의고사 평균 2등급일 때, 남은 20개월간의 최적 학습 플랜을 짜줘”라고 명령하면 3초 만에 수십 가지 버전으로 생성된다. 그것도 이 군의 계획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데이터에 기반해서다. 계획 수립 능력은 더 이상 인간 고유의 지적 능력이 아니다. 값싼 범용 기술이 됐다.

이것은 내비게이션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과거에는 가장 빠른 길을 아는 택시 운전사가 유능했다. 그의 머릿속 지도가 곧 돈이었다. 하지만 실시간 교통정보를 반영하는 내비게이션 앱이 등장하자, 길을 외우는 능력의 가치는 소멸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앱이 알려준 경로 위에서 발생하는 예기치 못한 변수—갑작스러운 폭설, 전방의 추돌사고, 끼어드는 초보운전자—에 어떻게 대처하며 끝내 목적지에 도착하는가의 ‘주행 능력’이다. AI는 완벽한 경로(계획)를 무한정 제공하는 내비게이션 설계자다. 인간에게 남은 가치는 그 경로를 실제로 달리는 베테랑 드라이버의 실행력과 문제해결력이다.

이 변화는 이미 산업 현장에서 시작됐다. 2025년 판교 소재 주요 IT 기업 52개사의 신입 개발자 채용 과정을 분석한 결과, ‘코딩 테스트 및 프로젝트 포트폴리오’가 채용 결정에 미친 가중치는 평균 78.4%에 달했다(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 2026.01 발표). 반면 ‘출신 대학 및 학점’의 가중치는 11.2%에 그쳤다. 2015년 동일 조사(각각 45.1%, 33.8%)와 비교하면 10년 만에 평가 기준이 극적으로 이동한 것이다. 기업은 더 이상 ‘무엇을 아는가’를 묻지 않는다. AI가 모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래서 당신이 만든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박 군의 망가진 웹 스크레이퍼는, 그래서 이 군의 완벽한 계획표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실행의 증거’가 된다.

그럼에도 왜 대치동의 시스템은 굳건한가. 2024년 대한민국 사교육 시장 규모는 27.1조 원(통계청, 2025.03)에 달했다. 이 거대한 시장은 본질적으로 불안감을 먹고 자란다. ‘실행’은 불확실하고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반면 ‘계획’과 ‘관리’는 눈에 보이고, 측정 가능하며, 판매하기 용이한 상품이다. 학부모는 월 300만 원짜리 의대 컨설팅을 통해 자녀의 합격을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구매하는 것이다. 계획은 가장 잘 팔리는 안정제다. 한국교육개발원(KEDI)이 매년 보고서에서 ‘수요자 맞춤 성과 관리’와 ‘창의적 인재 양성’을 부르짖지만(KEDI 연구보고서, 2025.12), 시장의 관성은 더 강력하다.

Judgment (판단과 회귀)

우리는 계획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지난 30년을 투자했다. 학생들은 더 정교한 계획표를 짜고, 부모들은 더 비싼 컨설팅을 구매하고, 국가는 더 복잡한 입시 제도를 설계했다. 하지만 이제 시스템은 학생들에게 가장 비싼 농담을 하고 있다. 그들이 필사적으로 연마하는 ‘계획 수립 능력’이야말로 AI에 의해 가장 먼저 대체될 기술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 것이다. 제도는 비싼 농담이 됐다.

다시 2025년 3월의 대치동 스타벅스로 돌아가자. 저녁 8시. 이 군은 마침내 오늘의 계획표를 100% 달성하고 뿌듯함과 함께 책을 덮는다. 완벽하게 관리된 하루였다. 같은 시각, 박 군은 마침내 코드의 버그를 잡는다. 그의 노트북 화면에, 몇 시간 동안 그를 괴롭혔던 데이터 목록이 비로소 깔끔하게 출력된다. 환희는 짧다. 그는 곧바로 다음 기능을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한 명은 잘 그려진 지도를 손에 넣었고, 다른 한 명은 지도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나는 그렇게 본다. 지난 시대의 성공은 지도 해독 능력에 있었다. 하지만 AI가 모두에게 개인화된 위성 지도를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시대의 유일한 가치는, 지도에 없는 길을 걸어가며 자신만의 경로를 만들어내는 능력에 있다. 대치동의 그 카페에서, 진짜 미래는 화려한 만다라트 계획표가 아니라, 수십 번의 에러 끝에 뜬 볼품없는 결과물 한 줄에 있었다. 그것은 시장이다. 그리고 시장의 규칙이 바뀌었다.

이 글이 도움이 되셨나요?

읽고도 결정이 안 서는 지점이 있나요?

공식 근거와 운영 답변, 보호자 경험을 구분해 확인할 수 있도록 질문을 남겨보세요.

비교과 결정 질문하기 →

댓글 (0)

댓글 불러오는 중...

WRITE A COMMENT

더 많은 인사이트 받아보기

매주 엄선된 핵심 정보를 무료로 보내드려요.

무료 구독하기

아침 브리핑, 이메일 열어보기 전에 알림으로 먼저 받아보시겠어요?

프로젝트 컨설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