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많이 푸는 게 함정이다
어느 겨울 저녁, 대치동 은마상가 4층 모 수학학원 복도. 중학교 3학년 김모군이 하루 종일 문제지를 붙들고 앉아 있다. 수십 장의 문제지. 그가 오늘 풀어낸 수학 문제들이다. 어머니는 이 양에 만족한다. "어제보다 더 많이 풀었네." 하지만 김군의 눈빛은 공허하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이 문제들을 풀고 있는지 모른다. 이 광경이 펼쳐지는 바로 그 시각, 교육정책 입안자들은 전혀 다른 계산을 하고 있다. 최근 발표되는 대학 지원 정책들의 핵심은 AI 분야와 산업 연계 교육에 집중되어 있다. 과거 대학 육성 정책의 실패 원인을


어느 겨울 저녁, 대치동 은마상가 4층 모 수학학원 복도. 중학교 3학년 김모군이 하루 종일 문제지를 붙들고 앉아 있다. 수십 장의 문제지. 그가 오늘 풀어낸 수학 문제들이다. 어머니는 이 양에 만족한다. "어제보다 더 많이 풀었네." 하지만 김군의 눈빛은 공허하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이 문제들을 풀고 있는지 모른다.
변화하는 교육 환경과 정책 방향
이 광경이 펼쳐지는 바로 그 시각, 교육정책 입안자들은 전혀 다른 계산을 하고 있다. 최근 발표되는 대학 지원 정책들의 핵심은 AI 분야와 산업 연계 교육에 집중되어 있다. 과거 대학 육성 정책의 실패 원인을 산업과의 연계 부족으로 진단한 교육당국은 이번에는 다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문제는 김군의 어머니가 여전히 구시대의 성공 공식을 믿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 현장 전문가들은 급변하는 사회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대학 교육의 내용과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초중등 교육 현장은 어떤가. 여전히 '더 많은 문제, 더 빠른 속도, 더 높은 정확도'라는 삼위일체 교리에 매달려 있다.
현실을 보면 더 명확하다. 최근 몇 년간 대치동 주요 학원들의 일일 문제 풀이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하지만 이런 양적 증가가 실제 학습 성과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상위권 대학 입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는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어, 문제 풀이량 증가와 실제 성과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더 중요한 건 방향성이다. 교육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소규모 사립학교의 구조개선 필요성'은 학생 수 감소라는 외적 압력 때문만이 아니다. 교육 내용 자체가 산업 현장의 요구와 괴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AI가 단순 계산과 패턴 인식을 대체하는 시대에, 여전히 반복적 문제 풀이에 매달리는 것은 증기기관차 시대에 말의 속도를 높이려고 애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말한 '문화자본'의 개념으로 보면 더욱 역설적이다. 현재의 문제 풀이 중심 교육은 겉보기에는 문화자본을 축적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낡은 형태의 문화자본을 재생산할 뿐이다. 진짜 문화자본은 '무엇을 풀 것인가'를 스스로 정의하는 능력, 즉 문제를 발견하고 설정하는 역량에 있다. 하지만 김군은 하루 종일 주어진 문제만 풀었을 뿐, 단 한 번도 자신만의 질문을 만들어보지 않았다.
정부 정책의 방향은 분명하다. 최근 대학 지원 정책에서 드러나듯 'AI 분야 특화'와 '산업 연계'가 핵심이다. 이는 단순 문제 해결 능력이 아니라 특정 산업과 연계된 실질적 역량을 요구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사교육 시장은 여전히 과거의 성공 신화에 갇혀 있다. 여전히 문제집과 반복 학습에 대한 수요가 높은 반면, 프로젝트형 교육이나 창의적 사고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낮은 상황이다.
학부모 불안 심화와 교육의 본질
이런 괴리는 학부모들의 불안을 더욱 키운다. 검증된 성공 공식이 사라진 상황에서, 그들은 더욱 확실해 보이는 양적 지표에 매달린다. '오늘 몇 문제 풀었나', '시험에서 몇 점 나왔나'가 자녀의 미래를 가늠하는 유일한 척도가 된다. 하지만 이는 착시다. 마치 나침반 없이 항해하면서 배의 속도만 재는 것과 같다.
진짜 문제는 방향성이다. 김군이 오늘 푼 수많은 문제들 중에서, 그가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본 것은 단 한 문제도 없다. 모든 문제는 누군가 미리 정의해둔 것들이었다. 정답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런 훈련을 받은 학생이 대학에 진학해서, 아직 정답이 없는 문제들과 마주했을 때 어떻게 될 것인가.
미래 교육의 방향성과 학생의 성장
몇 년 후, 그 학원 복도에서 김군을 다시 만난다면 어떤 모습일까. 여전히 문제지를 붙들고 앉아 있을지, 아니면 자신만의 질문을 만드는 법을 배웠을지. 그 답은 우리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문제를 푸는 기계를 만들 것인가, 문제를 발견하는 인간을 키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