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가 연재하는 책 'AI 시대의 대학 입시 해킹'의 8화다. 매일 아침 한 편씩, AI가 바꿔 놓은 미국 입시의 실제 작동 방식을 짚는다.


헤아가 연재하는 책 'AI 시대의 대학 입시 해킹'의 8화다. 매일 아침 한 편씩, AI가 바꿔 놓은 미국 입시의 실제 작동 방식을 짚는다.
지난 10년간 대학 입시에서 ‘에세이’는 학생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단 하나의 결정적 무대와 같았다. 학생과 학부모는 여름방학 전체를 바쳐 한 편의 완벽한 글을 조각했고, 고가의 컨설팅은 그 글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모든 과정은 지원서의 정점인 단 650단어의 글을 위한 것이라는 믿음이 상식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2026년 입시의 풍경은 그 믿음의 대척점에 서 있다. 프린스턴, 예일, 브라운과 같은 최상위권 대학들은 이제 그 화려하게 다듬어진 최종 결과물 너머를 보려 한다. 그들이 요구하기 시작한 것은 놀랍도록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 바로 교실에서 교사의 채점을 거친 평소의 작문 과제물이다. 이 조용한 변화는 AI 시대에 ‘진정성’을 검증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재설계되고 있음을 알리는 가장 강력한 신호다.
생성형 AI의 등장은 입학 사정의 기본 전제를 흔들었다. 챗GPT와 같은 도구들을 활용하면 누구나 문법적으로 완벽하고 논리적으로 정연하며, 심지어 감동적인 서사까지 갖춘 에세이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¹ 이는 대학 입학처에게 심각한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지원서 에세이가 더 이상 학생 고유의 작문 실력이나 사고 과정을 온전히 반영한다고 신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대학들은 이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정했다. AI 탐지기를 도입하는 소극적 방어에 그치지 않고, 평가의 무게중심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적극적 전략을 선택했다. 그 해답이 바로 graded writing sample(채점된 작문 과제물)의 요구다.² 이는 학생이 실제 학교 수업 중에 작성하고, 담당 교사가 직접 평가하고 피드백을 남긴 과제물을 제출하도록 하는 제도다.
프린스턴 대학교는 공식 입학처 웹사이트를 통해 역사, 영문학, 사회과학 과목 등에서 분석적 작문 능력을 보여주는 2-3페이지 분량의 과제물을 제출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³ 브라운 대학교 역시 비슷한 요구사항을 명시하며, 지원자의 학문적 글쓰기 스타일을 직접 확인하고자 하는 의도를 분명히 밝혔다. 이는 Common App 에세이가 ‘보여주기 위한 글’이라면, graded writing sample은 ‘증명하기 위한 글’임을 시사한다.
대학들이 채점된 과제물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가진 ‘위조 불가능성’ 때문이다. AI가 생성한 텍스트 한 편을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만, 한 편의 과제물을 둘러싼 전체적인 학업의 맥락까지 조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여기에는 학생의 글뿐만 아니라, 과제를 내준 교사의 의도, 채점 기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피드백과 최종 점수가 포함된다.
교사의 손글씨로 남겨진 코멘트, 수정 제안, 그리고 최종 등급이 매겨진 과제물은 단순한 텍스트 뭉치가 아니다. 그것은 특정 시점, 특정 교실 안에서 학생과 교사 사이에 일어났던 지적 상호작용의 명백한 증거다. 학교 공식 용지나 교사의 서명이 더해지면, 이 과제물은 한 학생의 학업 여정을 담은 일종의 ‘공문서’와 같은 신뢰도를 갖게 된다.
70% — 상위 20개 대학 입학사정관들이 '채점된 작문 과제물'을 AI 시대에 학생의 진정한 작문 능력을 평가할 가장 신뢰도 높은 자료로 꼽았습니다.⁴
이는 마치 스튜디오에서 완벽하게 보정된 프로필 사진과, 현장에서 예고 없이 찍힌 스냅 사진의 차이와 같다. 프로필 사진은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스냅 사진은 그 사람의 실제 모습을 정직하게 담아낸다. 대학들은 이제 지원자의 가장 정직한 학문적 스냅 사진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 학부모와 학생에게 새로운 과제를 제시한다. 더 이상 12학년 여름에 급하게 에세이를 준비하는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이제는 고등학교 4년간의 학업 과정을 꾸준히 기록하고,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될 과제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아카이빙’ 전략이 필요하다.
모든 과제물을 보관할 필요는 없다. 대학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명확하다. 첫째, 영문학, 역사, 사회과학, 철학 등 분석적이고 논증적인 글쓰기 능력을 요구하는 과목의 과제물이 가장 이상적이다. 과학 리포트나 수학 문제 풀이 과정보다는, 텍스트를 깊이 있게 해석하고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펼치는 능력을 보여주는 글이 효과적이다.
둘째, 교사의 피드백이 구체적으로 담긴 과제물을 선택해야 한다. 단순히 ‘A+’라는 점수만 적힌 과제물보다, 문장의 구조나 논리의 허점을 지적하는 코멘트가 빼곡히 적힌 ‘A-’ 과제물이 훨씬 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이는 학생이 비판적 피드백을 수용하고 자신의 글을 개선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2-3 페이지 분량 — 프린스턴 대학교가 권장하는 '채점된 작문 과제물'의 이상적인 길이입니다. 역사나 문학 과목에서 복잡한 주제에 대해 분석적 주장을 펼친 글이 가장 선호됩니다.³
따라서 9학년 때부터 좋은 피드백을 받은 과제물이 있다면, 그것을 버리지 말고 스캔하여 디지털 파일로 보관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학년별, 과목별로 폴더를 만들어 꾸준히 정리해두면, 12학년이 되었을 때 가장 빛나는 결과물을 손쉽게 선택할 수 있다. 이는 하루아침에 만들 수 없는, 시간과 성실함이 축적된 강력한 포트폴리오가 된다.
특히 International Baccalaureate(IB)나 Advanced Placement(AP) 과정을 이수하는 학생들에게 graded writing sample 요구는 위기가 아닌 기회가 될 수 있다. 이 교육과정들은 이미 내부적으로 깊이 있는 작문 과제를 필수적으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IB 디플로마 과정의 학생이라면 **Extended Essay(EE)**나 Theory of Knowledge(TOK) 에세이의 초고와 최종본이 훌륭한 제출 자료가 된다. 이 과제들은 장기간에 걸쳐 지도 교사의 피드백을 받으며 완성되며, 그 과정 전체가 학생의 연구 능력과 학문적 성장을 증명하는 기록이다. 특히 지도 교사의 코멘트가 담긴 초안(draft)을 함께 제출할 수 있다면, 입학사정관에게 매우 긍정적인 인상을 남길 수 있다.
AP 과정의 경우, AP Capstone 프로그램에 속한 AP Seminar와 AP Research 과목에서 작성하는 논문들이 가장 직접적인 활용 대상이다. 그 외에도 AP English Literature/Language나 AP US History, AP World History 등에서 작성한 주요 분석 에세이(analytical essays) 역시 대학의 요구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한다. 이 과제들은 정규 교과 과정의 일부로 교사에 의해 엄격하게 평가되므로 진정성 측면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핵심 전략은 최종 결과물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교사의 피드백이 담긴 초안, 그리고 그 피드백을 어떻게 반영하여 글을 개선했는지를 보여주는 최종본을 함께 준비해두는 것이 좋다. 이는 학생이 단순히 글을 잘 쓰는 것을 넘어, 학문적 대화에 참여하고 지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음을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이처럼 graded writing sample은 더 이상 선택 사항이 아닌, AI 시대 입시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완벽하게 조각된 한 편의 에세이가 아니라, 교실 안에서 땀과 노력으로 얻어낸 정직한 지적 성장의 기록이 우리 아이의 진정한 실력을 증명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이렇게 교실 안에서 검증된 '글'의 진정성을 확보했다면, 대학들은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서류 위에서 증명된 학생의 지성이, 과연 실시간 대화 속에서도 진짜 목소리로 울릴 수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이제 평가는 텍스트를 넘어 학생의 '말'로 향하고 있다.
이 글은 연재의 일부다. 내용은 공개 1차 출처를 기반으로 하며, 개별 입시 판단을 대신하지 않는다.
점수 너머, 아이만의 프로젝트로 지원 서사를 설계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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